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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6 15:36
우주생물학: 미래와의 조우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943  

우주생물학: 미래와의 조우

우주와 생명                                                        황재찬 - 경북대학교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슬픈열대』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개인이 모임에서 혼자가 아니듯, 사회에 속한 어떤 사람도 다른 이들로부터 혼자가 아니듯이, 인간은 우주에서 혼자가 아니다.”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외계 생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96년 화성에서 날아온 운석에서 미생물을 닮은 흔적들이 발견되었으며 이것이 화성생명의 화석이라는 주장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후 무생물적인 과정을 통해서도 비슷한 모양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어 이를 화성생명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며 지금은 미해결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이건Carl Sagan의 “충격적인 주장에는 충격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적절합니다. 이는 앞으로 외계생명의 발견에 대한 합의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직 외계생명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우주생물학이라는 학술분야는 “연구할 대상부터 찾아야 하는 분야”라는 뼈아픈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발견되지 않은 대상을 발견하려는 것이 연구의 가장 큰 목적인 경우가 물리학이나 천문학에서는 흔합니다. 예를 들면, 중력파,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같이 이론적으로 예측되었지만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현재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풀어야할 가장 중요한 연구주제로 꼽힙니다. 몇 년 전까지는 힉스Higgs입자 또한 그랬지요. 이러한 주제들이 추상화된 이론이 동원된 예측들인 반면 외계생명은 항상 있을 것으로 상상되어왔던 존재로, 여기에서도 발견 자체가 충분히 중요한 주제로 볼 수 있습니다. 외계생명의 발견은 천문학적 발견을 넘어 의심할 여지없이 인류역사상 가장 중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의 논의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외계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은 실제로는 어려울지 몰라도 방법은 간단합니다. 쉽게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이 우리 앞에 출현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상황이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 태양계 안에서도 여러 천체에 생명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화성에도 현생생명에 대한 여러 정황증거가 있습니다. 태양계에서 외계생명이 지구생명과 비슷하다면 발견은 쉬울지 모르지만 흥미는 좀 떨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지구생명과 많이 다르다면 발견은 어렵겠지만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지구생명과 다른 외계생명의 발견은 그만큼 충격적이고 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줄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보니,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미지의 존재와 조우했을 때 보고도 지나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미국 우주탐사와 관련한 한 보고서는 “미국의 우주탐사에서 외계생명과 조우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없다.”라고 주의를 환기합니다.

외계 고등문명이 발생시킨 인공적인 신호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근대 천문학의 역사 내내 있어왔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전파망원경이 등장한 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전파를 발견하며 곧 인공적으로 활용하다보니 이러한 연결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전파의 선구자들은 외계에서 보낸 인공전파 신호가 있을 가능성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군요. 지금 전파를 이용한 외계 인공신호 탐색시도는 세티SETI(외계지적생명체탐사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파를 알게 된 것이 100여년에 지나지 않고 꼭 전파를 쓴다고 지적인 것도 아닌 만큼 이름이 적절한 것은 아닌듯합니다. 특히, “우리와 비슷한 생명을 찾겠다면서 왜 하필 지적인 생명을 찾느냐”는 지적도 있고, 지적Intelligence인 것이 무엇인지조차 불확실합니다. 인류가 지구생명 중 지적인 유일한 종인지도 불확실하고, 더욱이 현생인류가 스스로 자신의 학명에 부여하듯이 현명Sapiens한지도 불명확합니다. 단기적 이익만을 위해 자신의 둥지를 파괴하고 스스로 멸종을 재촉하는 종을 지적이라거나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눈앞의 이익에는 영악한지 몰라도 결국 자기 꾀에 넘어가 몰락한다면 말입니다. 앞으로 보듯이 이 점 또한 우주생물학의 관심 영역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시도에서 원하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은 극히 적은 운에 달려있는데,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이 훨씬 더 적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세티는 상대편도 우리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마침 지금 우리에게 신호가 도달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거의 믿기 어려운 가정 위에 서있지만 청취과정에서 의도적인 신호보다는 외계문명에서 의도치 않게 새나온 신호나 우연히 외계문명의 통신을 감청하게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우주생물학이 외계생명과의 조우를 주요 과제로 고려한다면 외계고등문명이 지구에 남긴 흔적, 방문한 외계인들과의 조우에 대한 많은 주장이나 보고 따위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데, 이 점에서도 앞서 세이건의 조언 “충격적인 주장에는 충격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라는 관점에서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좀 보수적인 관점은 과학에서는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특히 과학이 근대세계에서 충실히 역할해온 지식에 대한 통제기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우주생물학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외계생명에 대한 관심은 서구에서는 계속 있어왔지만 지금은 우주에 생명이 보편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지지하는 몇 가지 이유가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첫째, 지구 극한환경에 서식하는 미생물들이 발견되어 왔는데, 예를 들면 높거나 낮은 온도, 강한 압력이나 진공, 강한 산도나 알칼리도, 매우 건조한 지역, 강한 복사나 방사선 따위에서 생존하는 미생물들입니다. 높은 온도로는 섭씨 113도에서도 사는 미생물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미생물들은 단지 높은 온도에서 견디기만 하는 고통을 즐기는 괴짜들이 아니라, 도리어 온도를 낮추면 살 수 없는 생물들입니다. 이러한 극한환경에 사는 기이한 미생물들이 현생지구생명의 최초조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괴짜는 그들이 아니라 맹독성인 산소환경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우리인지도 모릅니다. 극한환경 미생물의 발견은 우주에 생명이 살 수 있는 영역을 극적으로 넓혀줍니다.

둘째, 지구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생명의 특성과 지구에서 생명이 나타난 과정이 우주에서 아주 드믄 특이한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아 보입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가 우주적 규모에서 가장 흔한 원소들이라거나, 외계에서 생명에 필요한 다양한 에너지원의 존재가능성, 지구에서 조건이 갖추어지자마자 생명이 나타난 것 따위가 그렇습니다. 물론 생명이 지구에서 어떻게 출현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지구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안정한 계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기원과 역사에 밀접하게 연관 되어있으며 살아있는 지구라는 역동적인 환경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지구생명의 출현과 번성은 변화하는 우주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셋째, 1980년대 말 드디어 외계에서 행성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으며 2014년에는 그 수가 2천개에 이르렀습니다. 지구 정도 크기를 가진 행성도 발견되었고 적어도 은하안의 별의 수 정도의 행성이 별 주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학술적인 이유 이외에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우주시대의 도래와 외계인에 대한 일반인의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거대한 침묵

외계에서 온 인공적인 전파신호를 수신하겠다는 세티 계획은 외계에 우리 이상으로 발전된 문명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쯤 되고 수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우리은하의 나이도 그쯤 된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46억 년쯤 전에 탄생한 태양계는 우리은하의 다른 별들에 비해 아주 늦게 나타난 후발주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별들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우리은하안의 많은 별들은 태양계보다 훨씬 오래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인류문명의 미래가 꼭 어두워야만 할 이유가 없다면 우리보다 수십억 년까지도 앞선 외계문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흥미진진한 기대거리입니다. 그들의 선례는 어쩌면 우주에서 허용된 생명과 문명의 미래를 미리 보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우리문명의 미래인 우주 초고등문명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우주생물학에서 외계생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는 아직 외계생명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외계 고등문명의 정찰선이 우리를 방문한 증거도 포함됩니다. 즉, 우리를 방문한 외계의 전령에 대한 어떠한 충격적인 증거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은하에서 후발 주자임을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딜레마를 우주생물학에서는 ‘거대한 침묵의 문제Great Silence Problem’, 혹은 ‘페르미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페르미Enrico Fermi라는 물리학자가 수소폭탄을 만들겠다고 군사시설에서 연구하는 과정에서 점심 후 잡담 중 이러한 지적을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상황이 의미심장합니다. 실은 핵폭탄의 출현과 로켓기술의 출현은 시기적으로도 일치하지만 사실상 동일한 기술임은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우주문명으로 도약하는 기술을 갖추는 것이 마침 스스로 자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일치가 거대한 침묵의 원인인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하여, 지구생명의 기원이 우주생물학의 중요한 관심사항이듯이 지구생명의 미래 또한 우주생물학의 중요주제가 됩니다. 외계문명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하나뿐인 증거인 지구생명, 특히 문명의 미래 발전가능성에 대한 추측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의 추세를 기반으로 이리저리 추측해 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를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외계인의 형태는 우리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라기보다는 기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계가 내구성이 더 좋고 오랜 여행기간 동안 휴면상태로 유지되기도 쉬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인류기술의 추세가 그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별사이를 여행하는 데 걸리는 오랜 시간과 먼 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빛으로 4년쯤 걸리는 별사이 거리를 이동하는 데 만년씩 걸린다고 하여도 지름이 10만광년 정도 되는 우리은하를 가로지르는 데는 단지 2~3억 년이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방문한 외계문명의 탐사기계나 길을 잃은 정찰선, 그리고 그들 사이의 통신에 대한 증거가 없기에 거대한 침묵의 문제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술문명의 미래에 대한 반영일 수도 있는, 우리보다 훨씬 발전한 외계문명은 어떤 운명을 맞은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각자의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거대한 침묵’에 대한 답 중 하나를 문제의 규모에 걸맞게 ‘거대한 (문명)제거장치Great Filter’라고 합니다. 문명은 발전 단계에서 더 이상 넘지 못하는 벽을 만나게 된다는 추측입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서 우리를 방문할 수는 없더라도 그들이 잘 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재가 우주가 허용하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외계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떠한 증거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는 단지 우리를 방문한 외계 방문자나 사절단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우주진출

로켓이 등장한 초창기에는 우주시대가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은 기세였지만 이제 와서 보면 인간이 우주로 나가기는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미국이 40년도 넘은 옛날 옛적에 사람을 달에 보낸 적이 있었다는, 이제는 전설이 된 사실은 그 이유를 과학에서 찾는다면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세워졌다는 것만큼이나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단지 3년 만에 계획이 중단된 것을 보면 과학탐구가 주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의 순수하고 미화된 이미지는 국가의 의도를 감추기에 좋은지 모르지만 인간을 달에 보내는 계획이 미소간의 사활을 건 체제 경쟁에서 아낌없는 투자의 산물임은 명백해 보입니다. 인간의 우주 진출은 시작부터 군사적 목적과 대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1976년 두 대의 바이킹 착륙선에 의한 화성생명탐색의 공식결과는 비록 부정적이었지만 이것 또한 미국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후 화성에 여러 차례 더 방문했지만 이렇게 당당한 착륙을 시도한 경우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당시 정황에서는 어떠한 비용을 치루더라도 당당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지원이 각박해 지다 보니 내동댕이치는 식의 착륙을 하거나 곤두박질 혹은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경우까지 등장하는 실정이 되도록 인간의 우주 진출은 도리어 퇴보하고 있습니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국가가 주관하는 우주진출계획은 정치적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 홍보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연구수행이 목적이라면 터무니없는 비용을 요구하기에 과학계는 오래전부터 무인탐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인 목적이라면 상황이 다르겠지요. 지금과 같은 세계상황에서 민간자본에 의한 우주탐사시대가 열린다면 제국주의-식민지시기 이후 지금까지 지구규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윤과 효율만을 생각한 무자비한 자연파괴와 수탈, 인권유린이 이제 태양계적인 규모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도달한 우주는 무법천지의 참극이 난무하는 서부활극의 장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근대에 우리가 지구에서 목격한 사실이 이러한 예상을 가능케 합니다. 물론 대항해시대 이후 근대에 국가와 기업이 꼭 분리된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의례 그래왔다는 듯이 국가가 세금에 의한 강력한 자본으로 막대한 기반투자를 한 후 파생기술을 기업에 이전하거나 소위 민영화하는 겁니다. 앞으로 인간의 우주 진출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저는 인류공동의 이익을 위해 국가들이 협동하여 투명하게 진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주진출 기술은 인간의 자멸을 초래하는 것과 동일한 기술을 요구하기에 특히 그렇습니다.

외계와의 조우

외계생명과의 조우상황 그리고 그 사태가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 따위도 우주생물학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은 언제고 좋습니다. SF에는 이러한 조우에 대한 많은 상상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설정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데, 작가 램Stanisław Lem의 1961년 소설 『솔라리스Solaris』와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같은 작품에 대한 1972년 영화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마리 사자가 말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한다면 애완동물과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많은 개인적 경험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한편 상대동물의 관점은 우리가 들을 수 없으니 다소 일방적인 주장이기는 합니다. 적어도 인간사이의 소통에서는 어쩌면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는데,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해야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서구인(좀 더 자세하게는 서구,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본 원주민들과의 조우에서 인류학자들조차 자신들의 관점(예를 들면, 황금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라거나 원주민들의 성풍속에 관한 도를 지나친 비상한 관심)에서 보려하니 이해에 많은 왜곡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조우에 대한 비슷한 관점은 영화감독 큐브릭Stanley Kubrick의 1968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도 나타납니다. 특수효과가 인간이 달에 갔었다던 그 옛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는 이 영화는 요즘같이 특수효과에 일상적으로 과잉 노출된 세상에서는 어쩌면 관람하는 데 인내심이 약간 필요할 수도 있지만, 결국 결말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영화를 본 후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바로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라고 합니다. 감독 자신이 외계인과 조우에서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으로 보면 된다는군요.

외계인과의 조우에 앞서 우리는 인류문명 사이에서도 조우에 해당하는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근대 서구인들과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현지인들과의 조우는 일방적이며 매우 비극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작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1898년 작품 『우주전쟁』은 고등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지금은 쇠퇴해가는 행성에 사는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내용이지만 사실은 빅토리아 시기 대영제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극성을 부릴 때 일어난 산업혁명의 가공할 군사기술로 무장한 서구인들과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비극적인 조우를 풍자하는 문명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구인들이 화성인들의 가공할 열-광선무기 앞에 무기력하게 희생되듯이, 아프리카의 현지인 전사들은 기관총에 의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운명을 맞았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화성인이 상대가 되지도 않는 인간이 아닌 지구박테리아에 대한 저항력이 없어서 전멸하는데, 이 점 또한 식민지에서 벌어지던 상황을 그대로 풍자한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불행히도 현지인이 침입자와 함께 들어온 바이러스에 의해 치명타를 입습니다. 16세기 초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화성인과 유럽인 모두 선박을 타고 출현한 것도 동일합니다. 화성인은 우주선을 타고 오고, 유럽인은 그냥 배를 타고 오긴 했지만, 15세기 유럽인에게 대양을 건너는 것은 오늘날 우주여행을 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힘든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별사이 먼 공간을 여행해서 우리에게 올 정도의 방문자라면, 유럽인과 현지인의 비유보다는 인간과 동물사이의 접촉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더 현실적인 비유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명 간 조우가 꼭 비극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큰 문화적 격차가 있음에도 평화적인 방문으로 끝난 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구의 해양탐험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명나라가 개국 후 국위를 내보이기 위해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해양 평화사절단을 보냅니다. 중국의 탐험가 정화鄭和, Zheng He는 첫 항해에 28,000명이 동원된 317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1405년에서 1433년까지 여러 차례 인도양과 아프리카 탐사에 나섭니다. 정화가 희망봉까지 돌아 서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탐사는 1497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서쪽에서 출발하여 희망봉을 돌아 동진하기 거의 70년 전 일입니다. 정화의 경우에는 경제적 비용을 문제 삼은 황제의 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서구는 바로 경제적인 활로를 찾기 위해 탐험을 지속했음은 역설적입니다. 이 사건은 그 이후 동양과 서양에서 벌어진 역사전개에서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고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충분히 자급자족하던 명나라는 그 후 해금정책으로 돌아서고 이틈에 생존의 탈출구를 찾던 유럽인은 대항해시대를 열며 텅 빈 해양을 장악하고 곧이어 전 지구를 석권합니다. 관례에 따라 1500년 이후를 근대라고 한다면 근대는 서구의 시대이고 그 시작은 이 작고 위험한 탐험이었는지 모릅니다. 서구인이 과학을 출현시킨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근대에 일어난 문명 간 조우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지금, 국가기관은 외계생명과의 어떠한 조우에 대해서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상당히 보수적인 접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과거 역사에 비추어 매우 신중한 정치적 선택이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자신들을 방문한 난파선의 후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있었다면, 그리고 명의 황제가 조금만 다른 비전을 가졌더라면, 역사가 그렇게 일방적이고 비극적으로 흐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우가 아니라 인간을 만나 아예 종이 단절되고 만 많은 타 생명들이 겪은 운 없는 조우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외계와의 조우라고 하면서 SF나 과거 역사만을 논의한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가 외계의 존재와 조우한 것은 거대한 침묵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침묵이 지속된다면 이것은 문명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제약조건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외계생명에 대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증거로 꼽은 거대한 침묵의 문제는 어쩌면 지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고립된 공간일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음껏 쓰다가 더렵혀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 수 있는 그런 곳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주의 거대한 침묵은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로 뻗어나가는 인류의 미래라는 전망이 실현될 수 없는 꿈일 가능성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 과학의 발전이 한편으로는 자연의 제어와 통제를 통한 우주로 도약하는 무한한 발전이라는 희망을 주며 또 다른 쪽에서는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며 광범위한 미증유의 착취와 파괴를 가능하게 하였고, 스스로 자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최근 우리는 자신의 유일한 둥지가 이미 더렵혀진 것에 경악하고 있지만, 지속가능한 대안을 실행하지 않고 있음을 보면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미래와의 조우

저는 최근 과학과 결합된 기술 발전이 지구생명의 진화역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제시할 만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고 있습니다. 그 중요성이 지구생명의 기원에 버금가지는 않겠지만 비교하자면 지구상 산소의 축적에 맘먹는 사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소의 발생이 한 면으로는 당시 거의 모든 생명에게 가혹한 죽음을 요구했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이를 제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생명들이 출현하여 그들은 진핵세포와 다세포 생명으로 도약하였고 결국 우리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다른 점은 산소의 발생은 치명적이기는 했지만 수억 년에 걸쳐 축적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저는 이미 우리의 현실 앞에 차츰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생명공학, 정보기술, 로봇공학, 나노기술 따위가 바로 산소출현에 버금갈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목합니다. 위기는 지금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현생인류가 치러야 할 대가이며, 기회는 이를 극복하고 출현한 ‘새로운’ 종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우주생명’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요?

생명공학은 이제까지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지구생명 진화의 경로를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가속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의 진행은 통제되지 않을 것이므로 이러한 기술적 시도는 단지 현생인류가 저지르는 마지막 불장난으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보기술과 로봇공학의 발전 또한 현생인류의 생물학적 상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성공적인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실험적이며 무모한 기술의 진행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제공하는 위기는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그 기회의 면에서도 이미 심각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침묵이 이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던 케네디John F. Kenedy는 “저는 죄송스럽게도 그들의 과학자들이 우리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행성들에서 생명이 멸종했다는 재치 있는 말에는 조금 과장된 면이 있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라는 재담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러했을 가능성이 거대한 침묵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근대 과학기술을 신봉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딜레마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기계가 의식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에서 앞에 소개드린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또 다른 상황이 저의 관심을 끕니다. 여기에는 「할Hal9000」이라는 미래의 슈퍼컴퓨터가 나옵니다.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컴퓨터가 일으키는 정체성 혼란이 중요한 플롯인데, 인간의 창조물임에도 미래의 기계가 인식을 시작하였을 때 외계인과의 조우에서 중요할 수 있다고 앞에서 지적한 바로 그 상황이 재현됩니다. 즉,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의식을 가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화나 글에서 미래의 컴퓨터나 로봇이 인간과 비슷하게 사고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설정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리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그들은 초 윤리적일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희망이나 기대와는 달리 우리가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인간으로 길러져야만 합니다. 본성과 양육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상 구별이 되는 개념도 아니지만 하여튼 둘 다 중요합니다.

외계인과의 조우에 앞서 인류는 우리기술의 산물들과 먼저 조우할 것입니다. 이것이 먼 미래가 아닌 금세기 중반일 가능성에 대한 여러 보고가 있습니다. 미래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물론 아무도 모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를 되돌아보는 것, 이것도 우주생물학의 주요 역할이며 관심사입니다. 지금 대로 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니면 애써 모르는 척 하면서) 위험시대의 심연을 향한 발걸음을 가속화하게 될 것입니다. 전문가가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가 체스에서 인간챔피언을 이긴 것은 1998년이고 2011년에는 IBM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이 제퍼디Jeopardy!라는 퀴즈게임에서 역대 가장 뛰어난 두 사람을 따돌렸습니다. 게임은 인터넷 접속은 끊고 듣고 답하기 모두 일상 대화로 진행되었습니다. 혹시 단순한 퀴즈게임이 아니라 긴 대화라면 인간이 이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컴퓨터와 지금이라도 긴 대화를 시작한다면 걸핏하면 플라톤, 세네카, 아인슈타인을 들먹이며 우리를 주눅들이고 재미없게 하면서 압도하지 않을까요? 컴퓨터가 아직도 튜링테스트(서면 질의응답으로 컴퓨터를 사람과 구별하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컴퓨터가 아직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인간의 답변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답을 할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왓슨은 2억쪽 분량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고 그 양은 무어의 법칙(반도체 집적용량이 1년6개월에 두 배로 증가하는 경향)에 따라 증가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가 아직 인간을 능가하지 못하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인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이러한 능력의 정체를 알아내기 무섭게 곧바로 컴퓨터가 그 능력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최근 연구에서 이러한 전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폰노이만John von Neumann은 기계가 의식을 갖게 되리라는 자신의 발표 중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시는군요.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인지를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기계를 항상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지요.” 한편, 인간이 뇌의 기능을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에 대한 ‘통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불충분하고 잘못된 ‘이해’로도 ‘통제’는 꼭 해야겠다는 관료적 욕망은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지 모릅니다.

컴퓨터공학자 빌 조이Bill Joy의 우려는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우리의 가장 강력한 기술들 - 로봇, 유전, 나노 공학 - 은 인류를 멸종위기에 처한 종으로 몰아가고 있다. … 우리가 아직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이 기술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술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로봇, 유전공학의 산물, 나노 로봇은 폭발적인 위험요인을 공유하는데, 그들은 자기 복제가 가능하고, … 곧이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인간에 의한 통제는 커녕 인간은 이미 기계에게 상당한 통제권을 넘겨준바나 다름없습니다.

21세기는 현생인류가 지구에서 지배종으로 행세한 마지막 세기가 될 가능성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외부요인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착각으로 자진해서 그러한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데 역설이 있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기술의 가속적인 발전 때문에 출현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는 현생인류가 지금의 생물학적인 상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초래할 한 가지 가능성으로 미래학자 커즈와일Ray Kurzweil은 “나는 파국의 - 인류의 능력에 심대하고 파국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 해를 2045년으로 잡는다. 그 해에 창조된 무생물적인 지능의 총량은 현재 모든 인류의 두뇌용량을 합한 것의 백억 배에 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어의 법칙이 그때까지 지속된다면 그렇습니다. 이글을 읽는 독자께서 2045년이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이 그랬듯이 아무 일 없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각종 첨단기술들의 가속적인 발전이 우리를 우려하게 만드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로,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신중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에는 『특이점Singularity이 온다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이라고 번역된 커즈와일의 책이 유토피아적 미래의 밝은 청사진인양 비판 없이 읽히는 것이 놀랍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간이 사라진 미래에 대해서인데 말입니다. 위의 인용에서는 특이점을 파국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특이점은 폰노이만의 “끊임없이 가속하는 기술은 … [생존]경쟁의 역사에서,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결정적인 파국singularity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예견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이러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특이점에 알맞은 비유가 있을까요? 우주전쟁 같은 SF에 종종 나오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이룩한 외계인과의 조우라거나,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원주민과 서구인 사이의 조우,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사이의 조우, 혹은 그보다 근대에 벌어진 인간과 다른 동식물 사이의 조우가 비유로서 적절할 것입니다. 결과는 일방적일 수 있습니다.

사실 진화는 이러한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다윈Charles Darwin의 기대와는 달리 화석기록에 나타난 생명의 변화는 점진적이기 보다는 급격합니다. 화석기록에 따르면 하나의 종은 돌연히 출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잘 살다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1940년 고생물학자 골드슈미트Richard Goldschmidt는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종종 거대한 돌연변이가 출현한다고 제안했고 이를 ‘잠재적 괴물Hopeful Monster’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종이 장악하지 못한 주변부에서 이러한 돌연변이가 일단 성공적으로 성체가 되면 일거에 기존 종을 치환한다는 겁니다. 생명의 역사는 생태계를 장악한 기득권을 가진 종들이 잘 지내다가 변이로는 적응할 수 없는 급격한 재앙을 맞는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기술에 의한 생명의 창조와 기존생명들의 인위적인 조합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하고 무책임한 마지막 불장난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연에서 있어온 진화의 경로와 비교할 때 차이점은 인간은 단지 착각일 뿐임에도 과도한 자신감으로 사려 깊지 못하게도 자신을 대체할 ‘잠재적 괴물’을 스스로 출현시켜 파국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기술발전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여파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미래학자 아마라Roy Amara의 관찰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지구에서 생명의 역사도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 또한 개연성은 낮지만 거대한 충격을 가져오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더하여 우리가 쉽게 멈추기 어려운 더 큰 역설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정치학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생명공학은 특히 풀기 어려운 도의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발전을 유보하려는 어떠한 결정도 그것이 가져다 줄 명백한 혜택 앞에서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합니다. 인간강화와 인간이후posthuman 미래를 빨리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초 지능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과정은 엄청난 경제적인 이윤과 관련이 있다고 자신합니다. 하지만 그도 이러한 모험이 초래할 ‘존재론적 위험Existential Risk’을 알고 있기에 “만약 화성에 생명이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죽은 돌들과 생명이 없는 모래들은 나의 생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화성에서 지구와 독립된 생명이 발견되면, 태양계 안에서도 두 번이나 독립적으로 생명이 출현한 것이니 우주에 생명이 아주 흔하게 존재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방문한 외계 고등문명이 없다는 것은 기술문명 발전이 우주적 규모에 이르기 전에 때 이른 종말을 맞을 개연성을 높여주니 ‘문명제거장치’가 우리의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을 우려한 것입니다. ‘존재론적 위험’은 보스트롬이, 그리고 ‘거대한 제거장치’는 인간이후의 미래를 고대하는 경제학자 한슨Robin Hanson이 제안한 개념인데 이들에게도 내심 상황이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이지많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파국이 다른 방식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미래의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산물이 저렴하다면 모든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비싸다면 오직 부자들만이 혜택을 누리며 계층 간 분리를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세계의 놀라운 불균형과 빈부의 엄청난 불평등도 장기적으로는 기술변화가 초래한 측면이 있습니다. 결국은 현생인류의 종 분화와 새로운 종의 출현 가능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는데 기존 인간이 이러한 상황을 순순히 그냥 넘길 수는 없습니다. 생존을 건 투쟁과 혼란은 종 분화가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혼란의 이유는 전문가들의 장담과는 달리 인간은 자연의 실상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잘못 ‘오해’하고 있고 따라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치명적인 잠재력을 가진 생명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뇌과학 따위의 첨단기술이 현실에서는 도리어 기업 이윤의 원천으로 그리고 국가적 의제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방향을 기업이윤이나 국가의 야심이 아닌 인간의 미래에 대한 고려에 따라 신중하게 설정해야하는 것은 우리시대에 꼭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영원한 침묵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은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마지막에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저는 이 말에도 동의합니다. 지구생명의 역사를 본다면 인간이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굳이 아쉬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먼 미래가 아닌 바로 금세기 안에라도 닥쳐올 가능성이 있다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왜 우리는 미래에 관심을 가져야할까요? “미래가 문제시 되는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현재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그들은 이윤과 군사력, 통제를 추구하는 기업과 국가의 강력한 지원 하에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만든 미래가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관심이 없더라도 미래는 우리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피해갈 길이 없습니다. 미래는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미래는 그것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우리에 의해 변화되기 위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 않고,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미래의 결과는 현재 우리의 선택에 좌우됩니다. 미래에 대한 탐구는 결국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주체적으로 개입하여 미래를 건설하여야 하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전문가와 관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들의 욕망을 반영하여 기획한 미래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0세기의 천문학이 우주의 물리적인 특성에 매달려 온 데에는 시대를 반영한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21세기의 초입에 이번 세기 천문학의 향방을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생명의 관점이 점점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사실 21세기에는 천문학의 향방 정도가 아니라 인간종의 운명이 갈림길에 처해 있고 그것이 곧 현실화될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우주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탐색은 과학의 발전이 외계생명과의 조우를 실현시킬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과학과 기술 그 자체의 발전 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그 방향을 인간의 미래를 위해 설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알려줍니다. 아직 대상이 되는 외계생명이 발견되지 않은 시점인 지금 우주생물학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를 재발견하는 것이 우주생물학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모든 탐구가 우리를 되돌아보고 우리를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라면, 우주생물학 또한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 놓여있는 우주생명의 하나로서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탐구과정인 것입니다.

건축가 풀러Buckminster Fuller는 우주의 침묵에서 받은 경외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나는 종종 우리가 혼자일 것으로 생각하고, 종종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두 가지 생각 모두 충격적이다.” 우주생명의 존재여부가 바로 후발주자로서 지구에 갇힌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수정구슬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파스칼Braise Pascal이 느꼈던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듯합니다. 그 문맥은 이렇습니다.

내 삶의 짧음을 생각할 때면, 앞으로 올 그리고 이미 지나간 영원 사이에 삼켜진 그 짧음을, 그리고 내가 점유하거나 심지어 볼 수 있는 공간의 작음을 생각할 때면, 무한히 큰 공간에 완전히 에워싸인,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도 못하는 그 엄청난 공간을 생각할 때면, 나는 경악한다. 내가 왜 저곳이 아닌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왜 그 때가 아닌 지금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러한 이유도 없음에 나는 깜짝 놀란다. 누가 나를 이곳에 두었는가? 도대체 누구의 명령과 인도로 이 장소와 이 시간이 나에게 할당되었는가?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결국 현생인류가 추락한다면 그 원인은 단지 사려 깊지 못함, 탐욕, 착각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인간의 약점이 가공할 폭력과 미증유의 위험을 유발할 수 있는 수단인 근대과학기술과 만나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통제되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의도하지 않던 결과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착각한 것일까요? 저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무지’를 깨닫는 것이, 21세기 인간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치명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그 착각과 무지의 중심에는 근대인간의 왜곡된 세계관을 구성하는 근대서구인의 대표적 발명품 ‘과학’이 있습니다.

 


황재찬은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미국 텍사스대학에서 천문학 박사를 받았으며 지금은 경북대학교 천문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우주론이며 우주생물학과 인간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메일 주소jchan@knu.ac.kr

홈페이지http://bh.knu.ac.kr/~jchan/